[송장길 칼럼] 소라의 밤
[송장길 칼럼] 소라의 밤
  • 경제저널
  • 승인 2018.08.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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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 쫓기는 악몽에서 깨어나 몸과 정신이 개운치가 않다. 팔과 다리는 오그라들어 가슴과 복부쪽에 달라붙어 있다. 눈을 떠도 기괴한 잔상이 어른거리고, 매미소리 이명도 귀청을 괴롭힌다. 가슴도 두근거리고, 기력이 싹 빠져나가 기운을 차릴 수가 없다. 띵한 머리 속으로 가늘게 짜여진 그물이 너울거린다.

모기장은 보호막이자 감옥이다. 엷은 미광 속에서 옆과 위를 틈 없이 두른 망의 형체는 미상불 묘지의 봉분이다. 그 위로 두어 마리의 모기가 봉분 아래 숨어있는 큰 먹이의 피를 빨아먹으려고 웽웽거리며 날아다닌다. 모기와 나 사이의 긴장은 생명들의 살기 위한 공방이고,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일종의 작은 전쟁이다.

모든 것이 싫다. 괴물도 무섭고, 모기도 귀찮으며, 어둠도 두렵다. 방충망 안의 공간은 몸의 동선을 하도 좁게 차단해서 신체적으로 뿐 아니라 영혼의 날개짓도 자유롭지 못하다. 전후좌우로, 상하로 막혀 거동이 제한되면 사고의 영역도 자연히 줄어들어 영락없이 하등동물이거나 치매환자 꼴이 아닌가.

더듬거려 모기장의 지퍼를 열고 나원추형 껍질을 찢어 나오듯 몸뚱아리를 밖으로 내민다. 꼬마 전구가 방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두  평짜리 방은 작은 침대와 책상, 책장들로 가득차 있어서 그 사이는 바위 틈의 미로를 연상케 한다. 자리끼를 찾아 냉수 두어 모금을 들이킨다. 시원한 쾌감이 목구멍에서 창자로 이어지는 메마른 모래밭 위로 파도처럼 달린다.

소라는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무엇인가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허무하다. 의미있게 살아가려면 무엇이든 새 것을 찾아내서 써먹어야 할진대 좁디좁고 컴컴한 방 안에는 늘 익숙했던 ‘그게 그것’ 뿐이지, 촉수를 잡아끄는 아무 것도 없다. 그나마 협소한 방안을 나오라고 달래는 것은 창호지문에 입혀진 엷은 달빛이다.

거실로 나와 뜨락으로 나가는 미닫이문을 연다. 희미한 초승달빛조차 앞집과의 담벼락에 막혀 마당도 온통 어둠을 뒤집어 쓰고 침침하다. 구석구석에는 짙은 검정이 섬뜩하게 도사리고 있다. 늙은 감나무와 몇몇 관상수, 꽃나무들, 높은 담, 그리고 처마 등이 그림자를 시커멓게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그 검음 속에 알 수 없는 공포가 어른거린다. 공포의 끝은 무엇일까? 아픔인가, 죽음인가?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는가?

시선이 화단을 둘러싼 돌들에 들러붙는다. 큰 돌들은 장독대와 그 밑 지하의 광을 헐어버릴 때 땅에서 캐낸 제법 큰 바위급이다. 그 무거운 돌로 허리의 통증을 겪으면서까지 힘들여 화단을 만들었다. 어떤 돌은 굵은 나선 무늬도 띄고 있었다. 햇볕 내려쬐는 낮에 뚫어지게 바라보면 진주의 광택으로 빛나기도 하고, 영롱한 자개 빛깔로도 번득였다. 실제로는 그렇게 놀랍게 아름다운 형상은 드물지라도, 그런 인상이 조장하는 황흘한 느낌은 분명하다. 소라가 의지하는 바위,  과립으로 덮힌 소라의 석회질 뚜껑처럼 나선형도 아니다. 그러나 저 돌들이 없으면 정원은 풀과 나무들이 우거진 무질서한 나대지일 뿐이리라.

지금은 자개의 예술도, 오묘한 꽃들의 자태도 아닌 이 흉칙한 정원을 무엇 때문에 가꿨을까? 세상에는 화려한 밤도 없지 않겠지만 지금 내 앞에서 월광의 회절과 투영을 게우며 누워있는 밤은 낮의 형벌일까, 낮의 그늘일까? 아니면 낮을 기다리는 희원의 덩어리일까?

눈동자에서 뻗은 시선이 바위에 늘러붙어 있는 동안 가슴에서 뻗은 또 하나의 시선은 담 너머 하늘에 닿아 헤매고 있었다. 하늘은 늘 수평선 끝에서 손짓한다. 파도소리로 부른다. 부드럽고 상큼한 그 무엇이다. 한 번도 그 실체에 닿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거기에 당당히 서리라고 선망하고 기약하던 세계다. 무거움, 두려움, 죽음, 권위, 질곡, 간난, 균열의 어지러운 교직이 없는 건강한 세상일 터이다.

아련한 시선이 하늘에 닿으면 하늘은 다시 멀리 달아난다. 소라는 계속 따라갈 수가 없다. 담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몸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피를 흘리면서까지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더라도 즉시 범죄자나 미친 사람이 돼버린다. 담은 그 만큼 높고 단단하다. 현관으로 나가도 다른 벽에 부딪히고, 돌아가도 또 벽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디를 가도 벽을 만나고, 벽에 둘러 싸인다. 나선형 벽 속에 갇혀 사는 소라는 괴롭고 슬프며, 자괴감도 든다.

둥지에서부터 수평선에 이르는 여정은 멀고, 험하다. 흉칙한 악어도 만날 수 있고, 괴력의 상어도 무섭다. 사나운 파도도 거스르기가 힘들고, 심해의 망막함과 차거움도 몸서리쳐진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질곡들도 그런 장애물들이었다. 역경과 불행은 끊임없이 닥쳐왔다. 때로는 좌절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겨냈다.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을 안기기도 했다. 파도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신바람이 나기도 했지만, 그 또한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소라에게 도전은 늘 가파른 벼랑처럼 오르기에 위험하고 힘든 것이었다.

벼랑 위에 세상이 있다. 이슥한 밤인데도 아직도 졸음을 쫓으면서 밤일에 피곤한 야간 팀들, 전방 고지에서 총칼을 겨누고 생사가 걸린 시간을 꿰는 장병들, 전조등으로 암흑을 밝히며 빠꼼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거리 운전자들, 질퍽한 환락에 빠져있는 밤의 세계, 음습한 범죄의 현장들, 그밖에 이 밤에 떠오르는 모든 일들도 벼랑으로 올라서서 벌이는 각자도생이다. 위로 오르는 방법이야 다르겠지만, 힘든 과정이야 누구나 거쳤을 것이다.

지구의 반대쪽은 지금 한창 분주한 대낮이다, 질병을 극복해서 수명을 200세, 500세로 연장하려 하거나, 또는 죽음을 아예 정복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인간을 뛰어넘는 AI를 내놓겠다고 야단들이며, 하늘을 날으는 자동차, 우주에 가서 살 수 있도록 한다는 도전적인 연구도 한창이다.

벼랑 위로 높이 오를수록 상상을 뛰어넘는 현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앞서가는 첨단의 수준일수록 더 가파른 벼랑 위에서 벌어진다. 벼랑 위와 벼랑 아래는 분명히 다른 세상이다. 힘들게 오르지 않고 벼랑 위의 과실에 닿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소라도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지 벼랑 위로 오르려는 꿈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기들이 달려든다. 벌써 몇 군데를 물렸다. 이놈들은 공격 대상이 허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든,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든, 지쳐서 누워버리든 막무가내다. 가릴 게 없는 놈들이다. 그러니 모기의 신세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심신이 아늑하고 포근하다. 신체의 신호에 따라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본다. 배설물을 빼내버린 내장이 편안해진다. 편안함, 이 밤에 필요한 건 너이며, 네가 고맙다. 모기들이 계속 따라붙는다. 겨우 모기라는 미생물의 공격에 쫓겨 모기장의 지퍼를 열고 몸뚱아리를 구겨넣는다.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린다. 눈가로 피로감이 일제히 모여서 엉긴다. 몸이 나른해진다. 세상이 밤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송장길(언론인·수필가)  womaneconom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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