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회 칼럼] 다시 6월을 맞으며
[김영회 칼럼] 다시 6월을 맞으며
  • 경제저널
  • 승인 2018.06.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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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한국전쟁 65주년을 맞은 지난 2015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경제저널 자료사진
6·25한국전쟁 65주년을 맞은 지난 2015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경제저널 자료사진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었던 6·25전쟁 68주년을 맞는다. 6월에 시작된 그 전쟁이야기, 6월에 끝나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부디 ‘명답’이 나오기를―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68년, 직접 난리(亂離)를 겪은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으니 처참했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피비린내 나던 그 전쟁은 이제 교과서에나 나오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6·25전쟁. 처음에는 ‘6·25사변’이라고 하고 ‘6·25동란’이라고도 하더니 국민들은 그냥 ‘6·25’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계사에는 ‘코리안 워(Korean War)’ ‘한국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미화시켜 부릅니다. 북한과 동맹군이었던 중국에서는 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해 싸운 전쟁이라 하여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일본에서는 ‘조선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그 명칭에 관해서도 국가 간, 학자들 간에 주장이 다릅니다.

1950년 6월 25일, 동녘에 채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소련제 미그 전투기 170대에 탱크 240대를 앞세우고 선전포고도 없이 동부, 중부, 서부전선의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합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국군은 전날 절반이 주말외출을 나가 단꿈에 젖어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작은 충돌은 있었으나 전쟁이 터지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중무기도 없이 칼빈총, M-1소총이 전부나 다름없이 빈약한 무기뿐이던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인민군에 제대로 한번 맞서 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말이 후퇴지 소총을 거꾸로 메고 피난민과 함께 남으로 내려가던 풀죽은 국군의 모습은 패주(敗走),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27일 저녁 인민군은 이미 서울 동북쪽 미아리고개까지 다다라 수도 서울 함락이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KBS라디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지금 국군이 적군을 반격 중이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국민들은 안도했지만 사실 이 대통령은 전쟁 발발 보고를 받고 이미 아침 일찍 측근들을 데리고 재빨리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 밤중에 단 하나 뿐인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군에 의해 폭파한 것입니다. 다리를 건너던 500여명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180만명. 봇짐을 싸던 시민들은 강을 건널 수가 없어 대부분 피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 해보고 총을 거꾸로 메고 피난민과 함께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바빴습니다.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일본에 진주해 있던 미군을 급거 파병해 오산 근처에서 방어선을 쳤지만 속수무책 밀려났고 대전에서는 24사단장 딘 소장이 인민군에 생포당하는 어이없는 일마저 일어났습니다.

물밀듯이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은 7월 말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친 유엔군과 국군에 막혀 진격을 멈추었으나 전라남북도까지 모두 적의 손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대구, 포항, 경주, 부산뿐이었습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나마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는 소강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영국·캐나다·호주 등 유엔참전 16개국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아래 261척의 군함이 대규모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전세는 반전돼 급기야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됩니다.

보급로가 끊긴데다 퇴각로 까지 막힌 인민군은 유엔군과 국군의 공세로 전 전선에서 후퇴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이 이어졌고 북진, 북진, 38선을 넘어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합니다. 국군이 26일 북·중국경인 압록강에 다다라 만세를 외치는 그때 강 건너에서 물밀 듯이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자그마치 28만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새카맣게 밀려오는 중공군의 총 공세에 유엔군과 국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시 지옥 길과 다름없는 강추위 속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과 국군은 이날 또 한 번 서울을 내 주고 수원까지 점령당합니다. 소위 ‘1·4후퇴’였습니다. 다시 전국의 도로는 피난민 행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제공권을 장악하고 화력을 집중시킨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서울을 되찾았고 지금의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던 전쟁은 포성을 멈추었습니다. 3년 1개월 2일 만이었습니다.

6·25전쟁은 너무나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은 군인 전사 14만9000명, 민간인 사망 37만4600명, 부상·실종 등 총 189만8480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군은 3만7000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실종도 9만6000명이 나 되었습니다.

북한도 군인 전사 29만4000명, 민간인 사망 40만6000명 등  7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총 332만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중공군도 전사 11만6000명, 부상자도 21만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남쪽에서만 20만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명의 전쟁고아,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남북 모두 국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중 미군은 폭탄 46만톤, 네이팜탄 3만2400톤, 로켓탄 31만4000발, 연막로켓탄 5만6000발, 기관총탄 1억7000만발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엄청난 폭탄은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것과 맞먹는 양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휴전협정 조인식에는 미국과 중국, 북한만이 참석을 하였고 당사국인 우리 대한민국은 제외됐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며 끝까지 휴전을 반대해 미국이 제외시켰기 때문입니다.

6·25때 태어난 아이가 올해 예순 여덟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총을 들고 싸웠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있다 해도 80이 훨씬 넘은 노쇠한 노인들이 되어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한때 영웅이 될지언정 역사에는 전범자가 될 뿐입니다. 6·25전쟁은 한민족 5000년 역사의 가장 큰 재앙이었습니다. 결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이었습니다.

휴전이 된지 68년 만에 다시 맞는 6월, 북한과 미국 간의 북미정상회담이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 온 불안한 평화가 완전한 평화로 이어지는 ‘명답’을 내 놓을 수 있을지, 남북 7500만 민족의 가슴이 설레고 있습니다. 6월에 시작된 전쟁 이야기가 6월에 끝마쳐지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소망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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